[영상물 바로보기] `오징어 게임`, `킹덤` 등의 `폭력성`에 대해서
Journalist : 창조마을 | Date : 21/10/18 9:40 | view : 107724     
 

<오징어 게임>을 보고 난 후,..

미국의 어떤 '부모 미디어 감시단체'에서
이 영화의 폭력성에 대해서 제동을 걸려고 한다.

영상물에 대한 '미성년 자녀 보호 조치'는 오래 된 이야기다.
완벽할 수는 없지만, 필요한 조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되어 있다.

소위 말하는 '제도적 장치'와 '표현의 자유' 간의 논쟁은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맥락'이다.
물론, 상업적 목적으로 '맥락'을 가장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내가 최근 2-3년간 본 영화 중에서
특히 폭력성이 강한 영화는 <킹덤>, <오징어 게임> 정도이다.
나는 이 두 영화에서 '폭력성'은 '핵심기재'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 '폭력성' 때문에 이 영화를 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폭력성'이 어떤 역할을 한다는 것일까?

이 두 영화 모두 소위 말하는 '서민' 이야기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는 계층' 이야기다.

한국 뿐만 아니라, 세계 모두 사회는 계층화 되어 있다.
계층! 말이 좋아서 계층이지,
그것은 '질서' 이상의 기능을 한다.
<오징어 게임>과 <킹덤> 모두 이런 사회적 담론을 메시지로 하고 있다.
담론적 유사성과 '폭력성'이라는 언어적 기재의 유사성이 있다.
이 영화가 선택한 '폭력성'이라는 영상언어엔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위계성'이다.
이것은 '뛰어 넘을 수 없슴'이다.

<오징어 게임>에서는 '게임 규칙'이라는 것으로 그 '위계성'을 표현한다.
게임이 시작되면, 그 규칙에서 '절대' 빠져나올 수 없다.
우리가 <쥬만지>라는 영화에서도 확인한 바
이미 '시작된 게임'에서 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그 게임을 끝마쳐야 한다.
그래서 싫어도 계속해야 한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게 되었다.
원래 인생이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여간, 지금은 우리 모두 그런 게임을 하고 있다.

여기서 '폭력성'은 그 '위계성'을 제대로 표현하는 '매우 중요한 기재'이다.
가차 없는 위계성,
감정 없는 위계성,
기계처럼 정확한 위계성,
규정 이외에는 어떤 가치도 필요 없는 위계성,..
'프론트'는 이를 '공정성'이라며, 모세의 수건으로 위장을 한다.

<킹덤>에서는 그 '위계성'이 '전염병'이라는 '자연계의 이치'로 표현된다.
<오징어 게임>에서의 '위계성'과는 '그 내용'이 전혀 다르지만,
'폭력성'에 의한 '위계성'의 표현은 동일한 기재로 작용한다.
그것이 양민을 해칠 때 작용하든, 상위 계층을 벌 할 때 작용하든,
그 '폭력성'은 이 영화에서 절대적 언어로 작용하는 핵심기재임이 분명하다.

정리하면, <오징어 게임>과 <킹덤>에서 표현된 '위계성'의 내용은
각각 <현대사회의 위계적 계층의 오만함>과 <사회적 위계성을 벌하는 위계성>으로
전혀 다른 시각으로 구성되었다.
다시 말해서, <오징어 게임>이 현대사회에 내재된,
그래서 잘 보이지 않는 '위계적 폭력성'을 영상언어로 폭로했다고 한다면,
<킹덤>은 '위계적 폭력성'에 의해서 희생된
이름도 없이 버려지는 짐승보다 못한 이들이
'인내천 사상'의 맥락으로 '부활'하여 또 다른 방식의
그래서 '잘못된 위계적 폭력성'을 벌하는 참다운 '위계성' 인식/전달로 표현된다.

이 둘 모두 바로 그 '극단적 폭력성'을 영상언어로 제대로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 맥락을 벗어난 '폭력성' 비판은
이 두 영화의 영화적 메시지를 거부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순진함을 배경으로 하는 비판은 어리석을 뿐이다.

둘째, '거부'이다.

<오징어 게임>에서는 '규칙 3항'을 통해서,
<킹덤>에서는 '폐쇄/격리'를 통해서 '거부의 담론'을 심는다.
사실, 이는 '완전한 해결책'이 아니다.
두 영화에서도 '이런 거부'는 성공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오징어 게임>에서는 '폭력(죽음)'이 두려워서 게임을 포기한다.
<킹덤>에서는 좀비로부터의 격리를 원하지만,
이미 사회적으로 격리된 자신의 신분은 어쩔 수 없다.
방향은 서로 다르지만,
이 두 영화 모두 문제 해결의 해법은 폭력/죽음으로부터의 격리이다.
본질적 의미의 '거부'가 이뤄지지 못한 탓이다.

그 '온전한(?) 거부'는 역설적이게도 '폭력성'이라는 영상언어로 제시된다.
<오징어 게임>에서 죽은 455명은 비로소 게임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그들의 주검은 비참하게 다뤄진다.
하지만, 이건 실재가 아니다.
영상언어이며 시청자들에게는 논리적 학습의 반복이다.

<오징어 게임>을 본 사람들은
혹시 모를 지하철에서의 딱지 게임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1/456의 가능성을 선택하게 만드는
456명의 현실적 배경에 대한 '거부'를 학습할 것이 분명하다.

이 학습은 성공적 결과는
어쩌면 그 '폭력성'의 완전성(?)만큼 비례할 것으로 본다.
우리는 여기서 영화에서 죽은 455명을 볼 것이 아니라,
또한 456억을 탄 1명을 볼 것이 아니라,
455번의 '폭력성'이 의미하는 '영화적 메시지'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수 억, 수십 억의 대다 수 많은 시청자들은
게임 참가자 456명과 비슷한 상황에 있을 것이다.
VIP가 아닌 이상 우리들은 이미 분석 대상자들과 똑같은 환경하에 있기 때문이다.
시간 문제일 뿐,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

다만, 우리 중 누구누구는 '거부'할 수 있다.
<오징어 게임>의 메시지가 거기에 있다.
1/456을 통과한 한 사람,
그는 힘든 과정을 통해서 게임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그를 승리자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어렵게 배운 '거부'의 소유자(456억이 아닌)로 묘사한다.
사실, 그는 두 번째 게임을 유일하게 '거부'했던 인물이다.
시청자들에게 '바른 선택', 아니 '거부'를 종용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킹덤>에서 배울 수 있는 '거부'는 무엇인가?
이 영화에서 사용된 '폭력성'은 '탐욕'에 따른 결과물이다.
좀비들의 폭력성, 그런 좀비를 멈추게 하기 위한 폭력성
돌고 도는 이 처참한 광경은 그 원인에 화살을 겨누게 한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폭력성은 불가항력이 아닐 수 없다.
이 영화의 폭력성은 '이 불가항력'을 강하게 느끼게 하는 영상언어이다.
그만큼 시청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이런 불가항력'에 대한 반성으로 '탐욕'에 대한 '거부'로 다가온다.

반성의 주제로 등장하는 '탐욕'은 사회 계층을 막론하고 등장한다.
처음에는 기득권 계층의 탐욕으로 시작되지만,
그 확산은 결국 민중 스스로의 것으로 책임지워진다.
시청자들은 <킹덤>에서
사람들과 좀비들로 충돌하는 여러 '폭력성'을 접하면서
'탐욕'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공통적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그것은 '폭력성' 이면에 자리한 '분노'이다.

'폭력성' 그것은 '분노'의 또 다른 표현방식이다.
'분노'라는 감정을 제 때에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 성숙한 인격이다.
'분노'는 일종의 '가치 담론'의 결과이다.
만약에 어떤 판단이나 옳고 그름에 대한 반성이 없었다면,
'분노'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폭력성'을 접할 때,
그 이면의 '분노'를 살피지 않고
외형적 '폭력성'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우리는 중요한 가치담론을 외면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오징어 게임>과 관련해서
'폭력성'이 새삼 거론되고 있다.
이참에 우리는 영상물과 영상언어에 대한 이해를
보다 성숙하고 보다 세밀하게 할 필요가 있다.

영상 속 '폭력물'은 픽션이라는 사실 여부 또한 중요하다.
즉, 실제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라 '연기'라는 전제하에
영상물의 '맥락'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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